
<두 개의 비밀(The Two Mysteries)> 르네 마그리트, 1966년.
마그리트의 파이프는 우리에게 어딘가 불편함을 준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화면에는 누가 보아도 파이프처럼 보이는 대상이 그려져 있는데, 그 아래에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고 말하다니. 이것은 파이프를 기만하는 것일까, 아니면 관람자를 기만하는 것일까. 혹은 언어와 사물 사이의 관계를 비웃듯이, 고정관념에 갇힌 관람자를 약올리듯이, 마그리트는 파이프를 그려놓고 그것이 파이프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표면적인 논리로 보면 이는 모순이다. A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A가 아니라고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 문장에 쉽게 반박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림 속 파이프는 실제 파이프가 아니기 때문이다. 푸코 역시 이 단순하지만 결정적인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마그리트의 그림 앞에서 이렇게 묻는다. “그림 속의 파이프가 파이프 자체와 닮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도대체 무엇이 그것을 파이프라고 말하게 하는가?”¹ 이 질문은 작품의 핵심을 정확히 찌른다. 그림은 파이프를 닮았지만, 그 닮음이 곧 파이프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담배를 담을 수도 없고, 불을 붙일 수도 없으며, 입에 물고 사용할 수도 없다. 그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의 이미지이며, 파이프를 닮은 하나의 데생이다.
그렇다면 마그리트는 왜 이토록 섬세하고 정밀하게 파이프를 그려놓고, 그것이 파이프가 아니라고 단언했을까. 이 글은 회화로 철학적 사유를 수행한 벨기에의 대표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통해 다시 읽어보려는 시도다.
마그리트의 작품은 대체로 정밀하다. 그가 그린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파이프는 파이프처럼 보이고, 사과는 사과처럼 보이며, 중절모를 쓴 남자는 중절모를 쓴 남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대상들이 놓인 장면 전체를 바라보면, 우리는 곧 의문에 빠진다. 그것이 과연 회화 밖의 현실에서도 가능한 장면인가. 마그리트의 작품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정밀하고 사실적인 드로잉과 채색이라는 논리적 언어를 사용해, 비논리적인 장면을 캔버스 위에 연출한다.

<Personal values> 르네 마그리트, 1952년.
대상만 놓고 보면 그것은 그저 잘 묘사된 회화의 일부다. 그러나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듯이 전체 화면을 바라보면, 관람자는 혼란에 빠진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풍경이 지나치게 차분하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마그리트는 정밀한 이성주의적 묘사와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연출을 결합한 초현실주의 화가로 분류된다. 그러나 푸코는 마그리트를 프로이트에서 출발해 달리와 마그리트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초현실주의 해석 안에 가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마그리트를 파울 클레나 바실리 칸딘스키와 같은 계열에 놓고 분석한다. 푸코가 이러한 전제에서 마그리트를 읽은 이유는, 마그리트가 르네상스 이후 서구 회화를 지탱해온 두 가지 전통을 깨뜨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쿠르베씨> 구스타프 쿠르베, 1854년.
첫 번째 전통은 그림이 대상을 재현한다는 전통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의 회화는 대체로 대상의 재현에 충실했다. 그림 속 대상은 회화 바깥의 어떤 사물을 가리키고, 관람자는 그것을 인식한 뒤 하나의 이름으로 판단한다. 사과를 그린 그림은 사과를, 인물을 그린 그림은 인물을, 풍경을 그린 그림은 풍경을 가리킨다. 회화 속 대상과 관람자의 인식, 그리고 그 이후에 형성되는 관념은 결국 하나의 사물 혹은 하나의 대상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마그리트는 이 질서를 흔든다. 그는 대상을 재현하는 듯한 그림을 그려놓고, 그 아래에 그것이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파이프처럼 보이는 것을 그린 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는 것이다. 푸코는 이 장면을 설명하며, 마그리트가 고전 회화의 두 원칙을 뒤집는다고 본다. 하나는 “언어 기호와 조형 요소 사이의 엄격한 분리”이고, 다른 하나는 “닮음과 긍정 사이의 등가성”이다.² 즉, 전통적 회화에서 이미지는 말과 분리되어야 했고, 어떤 것이 무엇을 닮으면 그것은 곧 그 대상을 긍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마그리트는 이 두 원칙을 동시에 흔든다. 이미지는 문장과 함께 놓이고, 닮음은 긍정이 아니라 부정과 결합한다.
칸딘스키 이전의 회화는 대체로 사물을 화폭에 옮겨 담는 ‘유사’의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림 속 형태와 색은 바깥의 대상을 본뜬 것이었다. 반면 칸딘스키는 구체적인 대상이 없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회화를 사물의 재현이 아니라 음악적이고 감각적인 구성으로 이해했다. 다시 말해 칸딘스키는 비재현적 미술의 길을 열었다. 이후 현대 추상화가들은 대상과 작품 사이의 직접적인 유사성을 거부했다. 마티스의 야수주의적 색채와 피카소의 입체주의적 형태 역시 형태와 색채가 반드시 바깥의 대상을 따라야 한다는 의무로부터 해방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Composition VIII> 바실리 칸딘스키, 1923년.
푸코는 마그리트의 파이프 또한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다만 방식은 다르다. 칸딘스키가 대상을 아예 화면에서 제거했다면, 마그리트는 대상을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파이프를 너무나 정확하게 그린다. 그러나 그 아래의 문장을 통해 이미지와 대상 사이의 유사 관계를 부정한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림이 곧 대상을 재현한다는 믿음에 대한 반증이다. 이 점에서 마그리트는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회화가 ‘대상의 재현’이라는 원리에 묶여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파괴한다. 두 사람의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그들이 도달하는 결론은 같다. 회화의 본질은 대상의 지시에 있지 않다.

<성 안사노와 성녀 마르가리타가 있는 수태고지> 시모네 마르티니와 리포 멤미, 1333년 중 일부
두 번째 전통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에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결합된 그림을 찾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중세 미술에서는 이미지와 글자가 한 화면 안에 공존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를 예고하는 수태고지 장면은 이 특징을 잘 보여준다. 말과 형상, 성스러운 메시지와 시각적 이미지는 하나의 화면 안에서 함께 작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화가들은 점차 가시적인 것의 재현에 집중하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말, 문장, 개념은 화폭 바깥으로 밀려난다. 다시 말해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회화에서 글자는 점차 그림 내부에 직접 등장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글자는 그림 밖으로 추방되고, 제목이나 서명, 설명문 같은 형태로만 존재하게 된다. 회화는 보여주는 것이고, 언어는 그 바깥에서 설명하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파울 클레의 그림은 이러한 구분을 다시 흐린다. 그의 작품에는 글자와 이미지가 공존하며, 때로는 그림이 글자처럼 보이고 글자가 그림처럼 보인다. 그것은 기존 회화의 고정관념과 전통을 흔드는, 그림이자 글자인 무언가다. 마그리트의 파이프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파이프의 이미지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한 화면 안에 병치한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다시 하나의 화폭 안에 들어온 것이다.

<Once Emerged from the Gray of Night> 파울 클레, 1918년.
그러나 마그리트에게서 이미지와 텍스트는 서로를 보완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방해한다. 이미지는 우리에게 “파이프”라고 말하는 듯하지만, 문장은 그것이 파이프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림과 문장은 하나의 의미로 자연스럽게 결합되지 않는다. 둘은 한 화면 안에 있지만, 서로를 지지하기보다 서로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푸코는 이 구조를 “풀려버린 칼리그램”으로 읽는다. 칼리그램이란 글자가 사물의 형상을 이루는 시각적 글쓰기다. 그러나 마그리트의 작품에서 글자와 이미지는 더 이상 하나로 결합되지 않는다. 푸코의 표현을 빌리면, 이 작품은 “사물의 형태를 띠는 말”과 “말의 형태를 띠는 그림” 사이의 결합을 해체한다.³ 바로 이 지점에서 마그리트의 작품은 단순한 시각적 장난을 넘어선다. 그는 이미지와 언어가 서로를 보증한다는 믿음 자체를 흔든다.
이처럼 마그리트는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회화를 지탱해온 두 가지 축을 거부한다. 하나는 그림이 대상과 유사해야 한다는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글자와 이미지가 한 공간에 공존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다. 그렇다면 마그리트는 이 두 전통을 파괴한 뒤 무엇을 세우려 한 것일까. 푸코는 이를 유사(resemblance)를 해체하고 상사(similitude)를 작동시키는 움직임으로 분석한다.
유사는 언제나 원본을 전제한다. 어떤 것이 무엇과 닮았다고 말하려면, 그 닮음의 기준이 되는 원본이 있어야 한다. 초상화는 실제 인물을 닮고, 풍경화는 실제 풍경을 닮으며, 파이프 그림은 실제 파이프를 닮는다. 유사의 관계에서는 원본과 복제의 위계가 중요하다. 이미지는 원본에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 평가된다.

<대척지의 새벽(Aube à l'Antipode)> 르네 마그리트, 1966년.
반면 상사는 하나의 원본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닮은 것들이 서로를 부르고, 반복하고, 미끄러지는 관계에 가깝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우리는 동일한 형상적 모티브가 반복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 형상이 실제 대상과 얼마나 닮았는지, 혹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더 이상 핵심적인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형상이 다른 형상을 불러내고,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와 연결되며, 그 과정에서 고정된 원본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여기서 회화는 더 이상 사물의 복제가 아니라, 이미지와 이름과 관념이 서로를 비추는 시뮬라크르의 놀이가 된다.
푸코가 말하는 마그리트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준이 되는 원본은 더 이상 확고하지 않다. 하나의 사물은 하나의 이름으로 완전히 붙잡히지 않으며, 하나의 이미지는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지 않는다. 푸코는 유사와 상사의 차이를 설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유사는 원본을 가지고 있으며, 그 원본은 자신을 닮은 모든 복제들을 위계화한다. 그러나 상사는 시작도 끝도 없는 계열 속에서 전개된다.”⁴ 마그리트는 바로 이 상사의 세계를 연다. 그는 동일한 형상 안에 얼마나 많은 시각적 가능성이 잠재해 있는지를 보여주고, 우리가 보지 못했던 시각의 세계를 열어준다. 세계를 다르게 보고 낯설게 느끼게 하는 현대 미술의 감각은 바로 이 지점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사물을 일반명사로 부르는 순간, 그 사물의 본질은 언어라는 질서 속에 들어간다. 이름은 사물을 이해하게 해주지만, 동시에 사물을 한계 속에 가둔다. 우리는 어떤 형상을 보고 “파이프”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물로 분류한다. 그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낯선 형상이 아니다. 그것은 기능과 이름과 관념을 가진 하나의 대상으로 고정된다. 그러나 마그리트는 파이프의 형상을 그려놓고 그 이름을 부정함으로써, 인식과 해석의 폭력으로부터 사물을 잠시 벗어나게 한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파이프라고 부르고 싶다. 그림 속 대상은 너무나 파이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그리트는 그 익숙한 인식을 멈춰 세운다. 파이프를 보면서 파이프가 아니라고 말하는 모순. 그 모순 속에서 사물은 이름의 굴레를 벗어나 잠시 자유로워진다. 그것은 파이프이면서 파이프가 아니고, 이미지이면서 문장에 의해 부정되며, 사물이면서 동시에 사물이 아니다.
이때 “이것”이라는 말은 더욱 중요해진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화면 위쪽의 파이프 데생인가. 아래쪽의 문장 자체인가. 아니면 이미지와 문장을 모두 포함한 전체 화폭인가. ‘이것’이라는 지시대명사는 분명히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듯하지만, 그 대상은 계속해서 미끄러진다. 푸코는 이 작품 앞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고 쓴다. “당신들이 보고 있는 이 그림, 이 글자들, 이 전체 배치는 파이프가 아니다.”⁵ 바로 그 미끄러짐 때문에 이 문장은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지 않는다.

<이미지의 배반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르네 마그리트, 1929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 데생”이다.
이것, 곧 지시대명사(ceci)는 파이프라는 보통명사(pipe)가 아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문장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문장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 화폭, 이 쓰인 문장, 이 파이프 데생, 이 모든 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어디에도 파이프가 없다는 것일까.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여기에는 파이프가 너무 많이 있다. 이미지로서의 파이프, 단어로서의 파이프, 관념으로서의 파이프, 부정문 속의 파이프, 관람자의 기억 속 파이프가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실제 파이프는 아니다. 마그리트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사물이 이미지와 언어와 인식 속에서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여전히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우리는 그림을 보고 너무 쉽게 말한다. “파이프다.” 그러나 그림은 조용히, 그리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Endnotes
- Michel Foucault, This Is Not a Pipe, trans. and ed. James Harknes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3), 16.
- Foucault, This Is Not a Pipe, 32–33.
- Foucault, This Is Not a Pipe, 20–23.
- Foucault, This Is Not a Pipe, 44.
- Foucault, This Is Not a Pipe, 28–30.
Bibliography
- Foucault, Michel. Ceci n’est pas une pipe. Montpellier: Fata Morgana, 1973.
- Foucault, Michel. This Is Not a Pipe. Translated and edited by James Harknes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3.
- Foucault, Michel. This Is Not a Pipe. 2nd ed. Translated and edited by James Harknes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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