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놀랍게도 저건 예술 작품이다. 그 잠재 가치는 무려 1조 원이라고 추정하더라. 아 물론 그림은 저 검은 사각형 하나다. 가장자리의 흰 부분은 그림이 아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을 나열해 보면 위의 그림과 같은 추상화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가치를 의심한다. 사람들은 마크 로스코나 잭슨 폴록과 같은 현대 미술작가—더 나아가서 추상 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현대 미술에서 작품 내 미적 정보(대지)와 의미 정보(세계)가, 관람자가 “그림의 내용”을 곧장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매끈하게 조화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리자면 미적 정보는 대지(Erde), 의미 정보는 세계(Welt)로 볼 수도 있겠다. 대지는 ‘아직-말해지지 않음’이 아니라, 원리적으로 말해짐을 초과하며 끝내 완전히 투명화되지 않는 질료적·감각적 잔여에 가깝다. 반대로 세계는 의미를 드러내는, 즉 “사물과 관계들의 유의미한 연관망을 열어 놓고 그것이 작동하도록 질서화하는 개시의 장(field)”이다. 그런데 현대 미술은 흔히 세계가 즉각적으로 “설명”을 제공하기보다, 대지의 저항—재료, 표면, 밀도, 우연, 불투명성—이 전면에 남아 세계의 의미 작동을 지연시키거나 비틀어 놓는다. 그 결과 관람자는 내용의 이해에 곧장 도달하기보다, 의미가 열리기 이전(혹은 열린 뒤에도) 계속 남는 감각적 과잉과 마주하게 된다.
폴 세잔까지만 해도 분명히 무엇을 그렸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구도가 좀 어긋나 보여도 그가 그린 것은 사과였으며, 찌그러지고, 색이 달라도 그건 오렌지였다. 그러나 입체주의, 야수주의, 표현주의, 추상 표현주의 등 현대적인 미술사조가 등장하자 대중은 그 그림이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를 수신하기 어려워졌다. 대중이 그 그림이 내포하는 것이 무엇인지 호기심을 가지지 않게 만들 정도로 현대미술은 대중에게 친절하지 않다. 현대 미술에서 의미 정보가 미적 정보에 초월당해서 그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미적 정보가 의미 정보에 비해 너무 방대해서 그 그림을 이해하지 못한다고만 단정 지어서는 우리 자신—현존재와 현대인—의 전유물인 현대미술을 누릴 수 없다. 현대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지 미(美)에 대한 개념뿐만 아니라 숭고(Sublime)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어쩌면 미(美)라는 것은 기술복제시대 이래로 의미 없는 것일지도 모르며, 우리는 미(美)가 아니라 숭고를 느끼기 위해서 현대미술이 그렇게 난해함에도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보나보다.
미학에서 숭고를 처음 다룬 사람이 칸트라고 아는 사람들이 있던데, 엄연하게 미학 안에서 최초로 숭고를 다룬 사람은 그가 아니다. 나는 롱기누스, 부알로, 버크, 칸트 그리고 리오타르의 미학을 통해서 숭고에 대해서 살펴보려 한다. 현대미술 더 나아가 동시대 예술과 미학을 이해하고, 논하기 위해서는 숭고를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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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 | 현대미술이 왜 이렇게 난해하고, 대중과 멀어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 예술과 철학에 대한 담론을 독자와 나눔으로써, 실존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여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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